큰형수님은 집안이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암이 발견되기 직전까지 요양보호사 일을 하셨다. 푼푼이 모은 돈으로 아들 집 사는 데 보태주고, 마지막으로 노후 자금을 얼마간 마련한 후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셨다. 몸에 암이 자라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일을 하신 것이다.
노후 자금으로 얼마를 마련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 돈 써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쩌면 형수님의 삶이 나이 든 세대들의 일반적인 삶의 방식인 것 같다. 흔히 하는 말로 몸 상해가면서 돈 벌고, 그 돈 모두 병원에 가져다준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큰형님 내외분은 천주교 신자다. 일요일에 장례미사를 볼 수가 없어서 4일 장으로 결정이 되었다. 장례식장에 빈소가 마련되고 이튿날부터 조문객을 맞이하였다. 장례식장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차려주는 도우미가 있으므로 우리 형제들이 할 일은 거의 없었지만, 우리 7남매는 식장에 머물렀으며 때로는 조문객 중에 지인들이 있으면 함께 자리하기도 하였다.
발인 날 아침 7시에 장례식장을 출발하여 평생을 머물렀던 집을 한 바퀴 돌아 성당에 도착하였다. 형수님이 누워 계시는 관이 성당 안으로 옮겨지고 주위에 촛불이 켜졌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장례미사는 8시부터 시작되었다.
경건한 분위기에서 함께 기도하고 성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니 형수님은 우리 곁을 떠나 천국으로 가시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 순서로 미사에 참여한 모든 분이 관 위에 국화꽃 한 송이씩을 얹어 놓으면서 형수님을 보내는 미사는 끝이 났다.
성당을 출발한 영구차는 20분 거리에 있는 안동장사문화공원(화장장)에 도착하였다. 예전에 우리가 기억하고 있던 화장장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새로 지어서 그런지 연기가 나는 굴뚝도 보이지 않았고, 실내와 주변 모습은 말 그대로 공원이었다. 10시 가까이 되자 식구들은 화로 앞에 놓인 형수님의 시신에 손을 얹고 형수님을 보내는 짧은 의식을 치렀다. 이어서 형수님의 시신은 불이 이글거리는 화로를 향하여 터널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80여 분이 지나자, 형수님의 원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한 줌의 재로 바뀌어 나왔다. 이것을 유골함에 정성스럽게 담아 15분 거리에 있는 봉안 경당으로 모시고 갔다. 이곳은 천주교 안동교구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위한 영혼의 안식처이다. 그곳에서 신부님의 인도를 받아 마지막 보내는 미사를 간단히 올리고 유골함을 안치실에 넣으면서 모든 장례 절차가 끝이 났다.
형수님의 임종 직전부터 경당에 유골함을 안치하는 것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경험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음은 또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우리는 언제 죽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모두 영원히 살 것처럼,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다.
언제 죽는가를 안다면 지금을 의미 없이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넉넉잡아 10년을 산다고, 아니면 1년, 그것도 아니면 한 달을 살 수 있다면 어떨까?
내가 움켜쥐고 있는 미움, 원망, 재물을 모두 내려놓고 용서, 사랑, 감사, 베풂의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