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대하던 날, 남자라면 당연히 거치는 군입대지만 왠지 창설 없는 감옥에 가는 기분이 들었다. 집이 있는 예천 터미널에서 안동 36사단까지는 버스를 타면 한 시간 조금 더 걸리는 곳이다. 혼자 갈 용기가 나지 않아 친구 한 명과 같이 가기로 하였다. 부대 인근에 도착하여 함께 점심을 먹고 입소 시간 가까이 되어서 부대 앞에 도착하니 군인들이 부대 밖으로 나와서 안내하고 있었다. 부대 안으로 들어가면서 배웅나온 친구를 보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손을 흔들어 주는 친구에게 돌아가라는 손짓을 하고 안으로 들어 갔다.
그런데 담 하나 차이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담 밖에서는 친절이 넘치는 목소리로 “장정분들, 어서 안으로 들어 가십시다.”라고 했는데, 담 안으로 들어오니 180도로 바뀌었다. 존댓말은 사라지고 욕설이 섞인 말투로 명령하기 시작했다. “줄 맞춰, 앉아, 일어서, 엎드려뻗쳐, 야 이 새끼 줄 똑바로 못 맞춰, 머리 땅에 박아, 등” 군기 잡는다는 말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입소자 모두가 정신이 바짝 드는 순간이었다.
입소 후 신체검사하고 사흘째 되는 날 군복과 장비를 받으면서 정식 군인이 되었다. 연병장에서 훈련받는 군인들은 흰색에 가까운 연한 회색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우리들은 짙은 국방색 군복을 받았다. 왜 색깔이 다를까? 하고 의문을 가졌는데 한 주가 지나니 이해되었다. 더운 여름에 땀을 흘리고 세탁하면 물이 빠지기 시작하여 점점 군복 색깔이 변하였던 것이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입대하였기 때문에 함께 훈련받는 동료들보다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동생 친구들도 여러 명 볼 수 있었다. 군 생활이 힘들다고 하지만 훈련병들은 위-아래가 없이 모두가 같은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단체로 기합받는 때를 제외하면 큰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가끔씩 개인 관물(수저, 철모, 군화, 군복, 소총 등)을 분실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함께 기지를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비 오는 날 판초 우의를 쓰고, 군가를 부르면서 행군할 때는 눈시울이 적셔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3년간 복무할 자대로 배치하는 날이 되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소총과 철모를 제외한 개인 보급품을 더플백(duffle bag, 그 당시는 따블백이라 불렀다)에 넣어 떠날 준비를 마치고 모두 연병장에 모였다. 부대 이름과 그 부대에 배치된 병사 이름을 차례로 부르기 시작했다. 오전이 다 가도록 내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오전에 호명된 병사는 후방으로 배치되거나 후반기 교육을 받으러 갈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점심을 먹고 다시 모여 전방으로 갈 병사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가야 할 곳은 101 보충대라고 하였는데 그곳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어떤 부대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전방 지역으로 가는 병사들은 모두 저녁을 먹고 안동역까지 행군 후 열차로 이동한다고 하였다. 부대 입구로 나오니 훈련을 마치고 자대로 떠나는 아들을 보기 위해 찾아온 가족들로 인하여 말 그대로 야단법석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떠나는 아들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면서 찾고 있었고, 인솔자들은 병사들이 행군 대열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다하여 막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안동역에 도착한 병사들은 바로 전방으로 향하는 열차에 탑승하여 안동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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