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는 이야기 58

아내 말을 잘 들으면…

집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거리에 올림픽 기념관이 있다. 이곳에 아내는 수영, 나는 헬스를 하러 함께 다닌다. 신청은 매달 25일 전후에 온라인으로 하는데, 헬스는 수용 인원이 많아서 아무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수영은 새벽 6시 정각에 시작하면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마감된다. 조금만 지체하면 우선순위에서 밀려 허탕을 치고 만다. 지난 달 24일 수영을 마치고 오면서 아내가 ‘내일(25일) 신청 한다’라는 안내문을 보았다고 하였다. 저녁에 신청하는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공고문이 나와 있는데 신청일이 26일 06시로 되어 있었다. 이상한 것 같아서 공고문에 안내된 번호로 전화를 해보니 ‘26일이 맞다’고 하였다. 공고문도 26일, 전화 확인도 26일이니 아내가 착각한 것으로 알고 26일 아침에 신청하기로..

나는 손자를 얼마나 알고 있나?

나에게는 딸이 둘이다. 큰딸은 서울에 살고 있으며 11살 된 아들만 하나 있다. 둘째는 사위와 함께 미국에 살고 있으며 이제 9개월 된 딸이 하나 있다. 작년에 외손녀를 보러 미국 서니베일을 다녀왔다. 첫째는 서울까지 가기가 힘들기는 하여도 자주 만나고 있다. 딸과 사위가 각각 직장 생활을 하고 있고, 외손자가 초등학생이기 때문에 우리 부부가 서울로 가서 얼마간 머물다가 내려온다. 외손자가 1, 2학년일 때는 매월 2주, 3, 4학년일 때는 매월 1주를 봐주었다. 5학년일 때는 힘들지만 딸과 사위가 교대로 시간을 내어 해결해 보겠다고 하여서, 요청하면 한 주 정도를 돌봐 주고 온다. 초등학교 5학년인 외손자에게는 친구들이 다 가지고 있는 휴대폰이 없었다. 중학생이 될 때까지 사주지 않는다고 하더니만 어쩔..

이 세상을 떠난 큰형수님(2)

큰형수님은 집안이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암이 발견되기 직전까지 요양보호사 일을 하셨다. 푼푼이 모은 돈으로 아들 집 사는 데 보태주고, 마지막으로 노후 자금을 얼마간 마련한 후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셨다. 몸에 암이 자라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일을 하신 것이다. 노후 자금으로 얼마를 마련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 돈 써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쩌면 형수님의 삶이 나이 든 세대들의 일반적인 삶의 방식인 것 같다. 흔히 하는 말로 몸 상해가면서 돈 벌고, 그 돈 모두 병원에 가져다준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큰형님 내외분은 천주교 신자다. 일요일에 장례미사를 볼 수가 없어서 4일 장으로 결정이 되었다. 장례식장에 빈소가 마련되고 이튿날부터 조문객을 맞이하였다. 장례식장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차려주..

이 세상을 떠난 큰형수님(1)

새로 태어난 외손녀 돌보는 일을 끝내고 35일 만에 미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10월 16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큰사위 덕분에 서울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구미로 내려왔다. 한 달 반 정도 집을 비웠더니 집안이 먼지투성이다. 베란다에 모아둔 화분이 시든 것도 있고 마른 것도 눈에 뜨인다. 지인에게 물을 부탁하고 갔지만 아무래도 주인이 집을 비우니 화분도 낯설 이를 한 것 같다. 자동차는 방전되어 차 문도 열리지 않는다. 보험회사에 긴급 출동을 요청하여 시동을 걸고 아쉬운 대로 당장 필요한 몇 가지 식재료도 준비하였다. 미국에 가 있는 동안 가장 신경 쓰였던 일은 암 투병 중인 큰 형수 일이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미국에 있을 때 큰일이 발생..

서니베일 35일(2)

딸과 사위, 5개월 된 외손녀, 그리고 우리 부부가 함께 보낸 서니베일 35일은 우리 모두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딸이 변했는지 아니면 나이 든 우리가 변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부부와 딸 부부는 참 다른 것이 많은 것 같았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세대 차 때문일까? 처음 미국에 도착한 날 저녁, 아이를 재우는 모습이 마치 아이와 전쟁을 치르는 것 같았다. 무려 한 시간 가까이 아이가 울다가 겨우 잠이 드는 것 같았다. 딸과 사위는 아이가 홀로 잠드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바로 아기 침대에 눕혀놓거나 아니면 아이를 안고 있다가 잠들려고 하면 침대에 눕힌다. 그러면 아이는 바로 울음을 터뜨린다. 다시 안았다가 잠들려고 하면 또 침대에 내려놓으니, 아이는 또 자지러지게 울어댄다. 무려 한 시..

서니베일 35일(1)

미국에 있는 둘째 딸이 지난 4월 25일 외손녀를 낳았다. 서른여덟에 아이를 낳았으니 많이 늦은 셈이다. 미국에는 우리나라와 같이 아이와 산모를 함께 돌봐 주는 조리원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인 도우미가 집에서 숙식을 함께하면서 6주간(토, 일요일은 제외) 산모와 아이를 돌봐 주었다. 도우미 활동이 끝나고 며칠 간격을 두고 사부인께서 미국을 방문하여 석 달 가까이 돌봐 주셨다. 아내가 해야 할 일을 사부인께서 해주시니 고맙기 그지없다. 아직도 직장생활을 하시는 사돈어른을 혼자 두고 멀리 미국까지 가셔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사부인이 귀국하시고 일주일 간격을 두고 나와 아내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사위 덕분에 생전 처음 비즈니스석을 타는 행운을 누렸다. 마음대로 다리를 펼 수도 있고, 누울 수도 있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

그 무덥던 여름 열기도 이젠 한풀 꺾인 것 같습니다. 낮에는 무덥지만, 아침저녁엔 제법 서늘합니다. 여름 무더위가 아무리 악을 써도 밀쳐오는 가을 기운은 당할 수가 없나 봅니다. 온 세상이 기상이변이라고 아우성을 쳐도 계절의 변화는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2012년 수안보에 퇴직 연수를 가서 같은 분임조 활동을 했던 분 중 여섯 명이 부부 동반으로 매년 3회씩 1박2일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회원이 전국에 흩어져 있다 보니 이동 거리가 멀어서 불편한 점도 있습니다. 반면에 주관하는 회원이 본인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안내를 맡아주니 관광도 하고 맛있는 향토 음식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동안 만남이 뜸했지만 10년째 만나다 보니 이젠 정이 많이 들었고 모임에 대한 애착도 대단한 편입니다. 그런데..

내가 먼저 손을 내밀자

여행을 떠난 세 친구가 한방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몹시 코를 골았습니다. 아침이 되었을 때,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코를 고는 소리 때문에 한숨도 못 잤다고 했고, 두 사람은 너무 잘 잤다고 합니다. 코를 고는 사람은 누우면 바로 잠이 드는 스타일이니 잘 잘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옆에서 코를 골지만 별로 영향을 받지 않고 잠을 잘 잤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좀 예민한 사람으로 코를 고는 소리 때문에 한숨도 자지 못한 것이지요. 옆에서 코를 골았지만, 그 영향은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잠을 자지 못한 원인은 코 고는 소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책..

어디 가슴 뻥 뚫리도록 시원한 곳 없나요?

스스로 힘으로 나라를 지키지도 못하여 36년 동안 일제 식민지 생활을 했다. 해방되어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는가 싶었는데 공산 침략으로 전 국토가 폐허가 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났을 당시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지만, 70여 년이 지난 지금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으로 모두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다.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자”라고 외치면서 피땀 흘려 노력한 세대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식들에게는 더 이상 가난을 물러주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든 것을 참아가면서 오로지 일만 한 세대였다. 남을 원망할 시간도, 잘 났다고 싸울 시간도, 휴식을 취할 시간도 없이 오로지 일만 하며 평생을 보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노력도 해보지 않고 풍요로운 사회를 물려받은 사람들이 큰소..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40여 년간 몸담았던 교육 현장에서 물러나고 일 년 정도 지난 어느 날 똑딱이가 아닌 카메라를 사서 멋진(?) 사진을 찍어 보고 싶었습니다. ‘70세의 사진작가를 꿈꾸는 황무길’, 멋진 노후 모습이 아닌가요? 지인에게 부탁하여 사진기를 하나 샀습니다. 셔터만 누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도 복잡한지 설명서를 읽어보아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일 년 가까이 내버려 두었다가 평생교육원 사진 강좌에 등록하고 카메라를 다시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기가 DSLR이고, 크롭 바다이며 렌즈는 시그마란 것도 그때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진기를 들고 다닌 지가 벌써 8년이 넘었고, 이제 70살이 훌쩍 넘었건만 사진작가는 나와는 무관한 말이 되고 말았지요. 평소 감성과 미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