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 모음

맹사성과 나옹선사

목우자 2024. 7. 25. 16:21

어느날 젊은 관리 한 사람이 선지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속에 있는 암자를 향하여 부지런히 길을 가고 있었다. 암자의 스님은 손님이 올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법당 뜨락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그 관리가 암자에 도착하자, 스님은 예를 갖추며 "빈도는 나옹이라 합니다. 관원께서 어쩐 일로 예까지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관리는 "나는 장차 고려국의 대들보가 될 사람이오. 스님의 명성이 자자해서 좌우명 하나 얻으려고 왔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 관리는 명문가 출신으로 젊은 나이에 벌써 유, , 선에 통달했다. 게다가 고려국의 군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최영 장군의 손녀와 혼인했으며, 약관에 높은 관직에 올랐으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스님은 미소를 지으며,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생봉행(衆生奉行), 이 화두를 평생 가슴 속에 지니시지요."

"온갖 죄악 저지르지 말고 착한 일 많이 하라. 그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아닌가요. 나에겐 학문적으로 아주 깊고 심오한 뜻을 가진 그런 것을 말씀해 주셔야지요."

스님은 하늘을 한참 응시하다 말고 무겁게 입을 뗀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팔십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관원께서도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란 말을 아시지요. 한 차원 높이면 백견이불여일각(百見而不如一覺)이지요. 또 한 차원 높이면 백각이불여일행(百覺而不如一行)이 됩니다."

관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백 번 듣기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고, 백 번 보기보다 한 번 깨치는 게 낫고, 백 번 깨치기보다 한 번 실천하는 게 낫다. 아무리 많이 듣고, 보고, 깨달아도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이윽고 관리는 머리를 깊이 숙이며, "큰스님 고맙습니다. 뜻깊은 좌우명을 가슴 속에 비문처럼 새겨두고 살겠습니다."

 

스님은 젊은 관리에게 차를 대접하기 위하여 처소로 안내하였다. 스님은 먼 산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긴 표정으로 계속해서 차를 따르니 찻잔에는 물이 넘쳐흐른다. 관리는 스님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스님 뭣을 그렇게 보시옵니까. 찻물이 넘쳐흘러 지금 방바닥이 흥건히 젖고 있습니다."

스님은 근엄한 표정으로 젊은 관리를 쏘아보며, "관원께선 어찌하여 작은 찻잔에 물이 넘쳐흘러 방바닥이 엉망이 되는 것은 볼 줄 알면서 작은 머리통에 지식만 넘쳐 인품이 망가지는 것은 왜 볼 줄 모르시나요?"

관리는 암흑천지를 깨뜨리는 뇌성벽력 같은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지식도 중하지만 인품은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크게 깨달은 것이다. 감격과 환희에 겨워 자신도 모르게 스님 앞에 엎드려 큰절을 삼 배 올린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평소처럼 허리를 쭉 펴고 방을 걸어 나오다가 암자의 낮은 문틀에 이마가 탁 부딪쳤다.

"아야!" 소리를 내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뒷전에 앉아 계시던 스님이 조용히 법문하듯 말씀하신다. "매사에 감사하듯 머리를 숙여야 부딪치지 않는 법이지요."

관리는 또 한 번 눈이 번쩍 뜨였다. 여태껏 아는 게 좀 있다고 벼슬이 높다고 안하무인으로 온 나라를 휘젓고 다닌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다음 순간 그는 재승박덕(才勝薄德)에서 재덕겸비(才德兼備)의 새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는 바로 훗날 조선조 세종 때 이르러 청백리로, 경세가로, 명 정승으로 이름을 남긴 맹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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