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가 살아온 길 42

2. 점원과 급사생활 (6) 산림조합 급사

(6) 예천군산림조합 급사 생활 산림조합으로 옮겨 한 달 근무하고 첫 월급으로 1,200원을 받았다. 점원 월급 500원에서 무려 140% 인상되었다. 꼭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심부름으로 군청, 경찰서, 우체국, 농협 등 여러 기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영우사에 근무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게만 보냈었다. 그런데 공공기관을 드나들면서 직위가 낮은 사람은 나이에 관계없이 상급자를 깍듯이 모시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공부하지 않으면 평생 머리를 숙이면서 살아야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기 싫던 공부가 하고 싶었고, 교복을 입고 중학교 다니고 있는 친구들이 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내 고향 예천은 시골이라 정규학교 외에는 공부할 곳이 없었다. 지극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그해 9..

2. 점원과 급사 시절 (5) 점원 생활 마감

(5) 점원 생활 마감 6개월이 지났을 무렵 함께 있던 라디오 기술자가 독립하여 다른 곳에서 개업하였다. 라디오 수리 기술은 배울 수 없었지만, 하루하루를 무척 재미있게 보내고 있었다.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에는 주변 또래 점원들과 함께 모여 놀기도 하고, 가끔은 자전거를 타고 함께 놀이를 가기도 하였다. 이듬해 1월 말이 되자 월급을 인상하여 500원을 받았다. 나는 월급과 관계없이 생활이 재미있기만 하였는데 어머니께서는 월급도 너무 적었고 라디오 수리 기술도 배울 수가 없다며 다른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2월 중순 어느 날 어머니께서는 산림조합 급사(사무실 청소와 심부름이 주된 역할이었음) 자리가 났는데, 가보자고 하셨다. 함께 가서 면접을 봤는데 자전거에 쌀 한 가마니를 실을 수 있는지 물으셨다..

2. 점원과 급사 시절 (4) 첫월급 300원

(4) 첫 월급 300원 한 달 정도 지나니 점원 생활이 제법 익숙해지고 재미도 있었다. 우리 집에는 한 대도 없는 새 라디오가 수십 대 진열되어 있고, 손 장난할 수 있는 전기재료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찾아오는 손님도 없고 별로 할 일도 없어서 심심하던 어느 날이었다. 아직 라디오에 배터리를 넣는지, 전기를 연결하는지를 알지 못하던 때다. 배터리용 라디오에 전선을 연결하여 전기 콘센트에 꽂았더니 ‘펑’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났다. 도로 건너편 가게에 있던 주인아저씨가 뛰어와서 현장을 보고는 “라디오 한 대 태웠다”라고 하였다. 비싼 라디오 한 대를 못 쓰게 만들어서 화가 많이 났을 텐데 더 이상 꾸중은 하지 않았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어느 곳에 취직하여도 기술을 익..

2. 점원과 급사 시절 (3) 자전거 타는 것을 배우다

(3) 자전거 타는 것을 배우다. 이튿날인 3월 1일부터 점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린 나이에 낯선 곳에서 생활하려니 어색하기만 했다. 주인아저씨는 먼저 두 가지를 익히라고 하였다. 한 가지는 진열된 물품의 용도와 판매 가격을 익히는 일이었다. 또 한 가지는 심부름 다닐 수 있도록 자전거 타는 연습을 하라는 것이다. 가게 안에서 물건들을 익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자전거 타는 것이 문제였다. 우선 자전거 핸들을 두 손으로 잡고 끌고 다니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다음은 끌고 가다가 한 발을 페달 위에 얹어서 가는 것이다. 몇 번 넘어지기도 했지만 제법 익숙해지자 두 발을 모두 얹고 안장에 앉는 연습을 했는데 다리가 짧아서 두 발이 모두 페달에 닿을 수가 없었다. 수없이 넘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겨..

2. 점원과 급사 시절 (2) 점원이 되다.

(2) 점원이 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 앞 도로(우리 집은 마당이 거의 없으므로 집 앞에 있는 도로가 마당 역할을 했음)에서 친구와 구슬치기를 하고 있던 1964년 2월 28일 오후였다. 저 멀리서 오시는 분이 6학년 담임 선생님같이 보였다.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실 일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설마 했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모습이 틀림없는 담임 선생님이었다. 가지고 있던 구슬을 얼른 안주머니(당시 내복을 사 입을 형편이 안 되었기 때문에 많이 해진 바지는 안에 입고, 덜 해진 바지는 밖에 입는다. 안에 입은 바치는 절로 내복이 된다)에 넣고 하늘 같은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이 “아버지 집에 계시지?”하고 물으셨다. “예”라고 대답하고는 선생님을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안내해 드렸다. 밖에..

2. 점원과 급사 시절(1) 중학교 진학을 못 하다

(1) 중학교 진학을 못 하다. 초등학교 시절 나의 공부 실력은 중간(?) 정도인 것으로 짐작된다. 6학년 때는 공부를 조금 더 잘했는지 2학기 반 대항 학력고사에 우리 반 대표 5명에 뽑혀서 출전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초등학교 시절 나의 간절한 바람은 상점의 점원이 되는 것이었다. 공부를 안 해도 되고, 손님이 없어서 한가한 시간에는 졸기도 하는 점원들의 모습이 너무 부러웠기 때문이다. 지금은 거주지역과 희망에 따라 초등학교 졸업생 모두가 중학교에 배정된다. 그러나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입학시험을 쳐서 합격해야 입학할 수 있고,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초등학교 6학년 2학기가 되면 중학교 입학시험 예정자를 파악하는데 나는 당연히 진학하는 것으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막상..

1. 초등학교 시절 (16) 초등시절 에피소드를 끝내며

(16) 초등 시절 에피소드를 끝내며 무척 힘든 시기였지만, 그 당시는 온 세상이 가난하였기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일주일에 한두 번 학교에서 주는 찐 우유나 옥수수빵도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난다. 8남매가 둥근 상(지금 돌이켜보면 너무 작은 크기이지만 그때는 너무 큰 상이었다고 생각했음)에 옹기종기 앉아 식사하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재미(?)있지 않은가? 쌀알보다는 보리알이 더 많은 밥에 반찬이라고는 채소와 된장찌개뿐이었지만 8남매가 함께 먹으니 너무 맛이 있었다. 그때 먹던 보리밥, 채소, 된장찌개는 요즈음 모두 건강식품에 해당한다. 우리가 먹는 밥은 큰 그릇에 함께 담았지만, 아버지 밥은 1인용 밥그릇에 별도로 담는다. 아버지 밥그릇에는 우리가 먹는 밥보다 하얀..

1. 초등학교 시절 (15) 눈감고 안 봤어요.

(15) 눈 감고 안 봤어요. 초등학교 시절 특별히 친한 친구가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처음 살던 집(대창중․고등학교 바로 밑)과 가까이 있었는데 그 집에서는 옵셋 인쇄를 하고 있었다. 또 한 명은 아버지가 극장 바로 앞에서 과일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집을 비울 때는 친구가 가게를 보곤 하였다. 어느 날 과일 가게를 하는 친구가 “내가 극장 입장권을 마련할 테니 세 명이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라고 하였다. 약속한 날짜 저녁에 친구 과일 가게 앞에서 만나 미리 사놓은 입장권을 들고 세 사람이 함께 들어가서 영화를 보았다. 영화 제목은 ‘아낌없이 주련다’로 기억하고 있다. 너무 오래되어서 영화 내용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당시 영화로는 파격적인 장면이 있었다. 남녀가 비키니 차림으로 해..

1. 초등학교 시절 (14) 물고기 잡이

(14) 물고기 잡이 내가 어린 시절에는 오염물질이 없어서 냇가에 물고기도 많았다. 둘째 형이 피라미 낚시를 잘하여 가끔 물고기를 잡아 오곤 하였다. 나와 셋째 형은 주로 어항이나 줄낚시(여울목 양쪽에 막대를 꽂고 낚싯바늘이 물에 살짝 담길 정도의 높이로 낚싯줄을 설치한다. 물고기가 물면 들어가서 낚싯줄에 걸린 피라미를 따면 된다)를 이용하여 피라미를 잡았다. 한 번은 읍에서 3km 정도 되는 용산리 냇가로 갔다. 큰 물줄기에서 갈라진 작은 물줄기를 어렵게 막고 물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물이 줄어들기 시작하니 여기저기서 피라미가 튀어 오른다. 물이 거의 없어지면 피라미는 수두룩하고 작은 돌 밑에 숨어있는 미꾸라지, 꾸구리, 텅어리 등의 물고기를 건져 통에 담기가 바쁠 지경이었다. 잡은 물고기들은 더위에 ..

1. 초등학교 시절 (13) 아이스케키, 찹살떡 장사

(13) 아이스케키, 찹쌀떡 장사 셋째 형과 내가 함께한 또 다른 일이 있다. 여름이면 아이스케키(ice cake의 비표준어 : 우유에 설탕, 팥, 달걀, 향료 따위를 섞어 액체로 만든 재료에 나무막대기를 꽂아서 얼린 얼음과자) 팔기, 겨울 저녁에는 찹쌀떡 팔기이다. 제빙공장에서 판매하는 얼음과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한 가지는 아이스케키인데 요즈음 판매되고 있는 ‘비비빅’과 모양이 비슷하며 많은 사람이 즐겨 먹었다. 다른 한 가지는 아이스캔디인데 요즈음 판매되고 있는 엑설런트와 흡사하다. 한 개씩 종이 포장되어 있으며 그 당시 가격은 2원~3원 정도로 고급 제품에 해당한다. 물론 두 가지 모두 맛과 질은 요즈음 판매되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리 형제가 판매한 것은 아이스케키인데 한 개에 1원으로..